에드윈 라이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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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윈 라이샤워는 191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 일본사 연구 및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개발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정보 장교로 복무했다.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주일본 미국 대사를 지냈으며, 1964년 피습 사건으로 수혈을 받은 후 C형 간염에 감염되어 1990년 사망했다. 그는 학자로서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일본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일본: 과거와 현재》, 《엔닌의 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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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라이샤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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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에드윈 올드파더 라이샤워 |
원어 이름 | Edwin Oldfather Reischauer |
로마자 표기 | Edwin Oldfather Raishawo |
출생 | 1910년 10월 15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시바구 시로카네다이마치 |
사망 | 1990년 9월 1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호이아 |
국적 | 미국 |
배우자 | 에리너 아드리아엔 당통 (1956년 사별) 하루 마쓰카타 |
부모 | 어거스트 칼 라이샤워 |
자녀 | 로버트 라이샤워 포함 3명 |
학력 | |
대학 | 오벌린 대학교 (문학사) |
대학원 | 하버드 대학교 (박사) |
박사 학위 논문 제목 | Nittō guhō junrei gyōki: Ennin's Diary of His Travels in T'ang China, 838–847 (입당구법순례행기: 엔닌의 당나라 여행 일기, 838–847) |
박사 학위 논문 년도 | 1939년 |
지도교수 | 세르게 엘리세에프 |
경력 | |
직업 | 역사학자, 외교관, 교수 |
근무지 | 주일본 미국 대사 (1961년–1966년) 하버드 대학교 |
학문 분야 | 일본학 동아시아학 |
연구 활동 | |
수상 | |
기타 정보 | |
주요 지도 학생 | 게일 리 번스타인 존 W. 다우어 존 커티스 페리 제이 록펠러 에드워드 W. 와그너 존 휘트니 홀 하워드 히벳 로버트 스칼라피노 |
2. 생애
1910년 일본 도쿄시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벌린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일본사를 전공했으며,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 연구원과 하버드 대학교 강사로 활동하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옌칭연구소 연구원 시절인 1938년 한국을 방문하여 맥 매큔과 함께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미군 정보장교 및 국무부 특별 보좌관으로 일했다. 전쟁 후 학계로 돌아와 195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1961년부터 1966년까지는 주일 미국 대사를 지냈다.
주일 대사로 재직 중이던 1964년, 괴한에게 피습당하는 사건을 겪었다. 치료 과정에서 받은 수혈로 인해 간염에 감염되었고, 이는 이후 그의 건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20년 이상 간염으로 투병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호이아에서 간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910년 10월 15일 일본 도쿄시 시바구 시로카네다이마치의 메이지가쿠인 내 선교사 주택에서 태어났다.[44]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교 선교사인 오거스트 칼 라이샤워로 도쿄여자대학 설립에 관여했고, 어머니 헬렌 시드웰(올드파더)은 일본 최초의 농아학교인 일본 구강학교를 설립했다. 라이샤워 가문은 오스트리아계 이민 출신이다. 그의 생가는 현재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의 메이지가쿠인 중학교·메이지가쿠인 히가시무라야마 고등학교 부지 내로 이전되었다.

어린 시절 일본인 가정부에게 일본어를 배웠으나, 대학원 진학 후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까지는 서투른 수준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쓰키지에 있던 미국인 대상 국제학교인 아메리칸 스쿨 인 재팬(ASIJ)에 다니며 교내 신문 '랜턴' 창간에 관여했고, 스포츠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형 로버트와 함께 일본 출생 미국인을 의미하는 '본 인 재팬(BIJ)'으로 불렸으며, 스스로를 "우연히 일본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지인, 사용인, 가루이자와의 별장에 머무는 일본인 자녀들과 교류했다. 1923년 (다이쇼 12년) 관동 대지진 당시에는 가루이자와에 머물고 있어 피해를 면했으며, 가루이자와역에서 피난민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가루이자와에서 교류했던 인물 중에는 훗날 공산주의자이자 스파이로 알려진 캐나다 외교관 에드가턴 허버트 노먼도 있었다.[44] 라이샤워는 훗날 자서전에서 가루이자와에서의 생활이 도쿄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가루이자와에는 라이샤워 별장이 현존하며, 국가 등록 유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비공개).
1927년(쇼와 2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오벌린 대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1] 졸업 논문 주제는 '1860년 이전의 미일 관계'였다. 라이샤워는 훗날 자신의 삶의 목표가 미국인들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리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2]
오벌린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일본사를 전공했다. 당시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연구에 관심을 가진 대학원생은 자신과 형뿐이었다고 회고했다.[45] 러시아-프랑스 출신의 일본학자이자 도쿄 대학교 최초의 서양인 졸업생이었던 세르게이 엘리세예프 밑에서 수학했다.[3] 1939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당나라 시대 승려 엔닌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記일본어)에 대한 연구 및 번역인 "''닛토 구호 준레이 교키'': 엔닌의 당나라 여행 일기, 838-847"이었다.[4][3][5]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 연구원 시절이던 1938년 한국을 방문하여 맥 매큔과 함께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개발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과 군 복무
1940년 10월,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감지한 라이샤워는 미국 해군에 군사 정보 활동에 필요한 일본어 전문가 부족 문제를 지적하며 일본어 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후 해군 중위 앨버트 힌드마시의 인정을 받아 미국 해군 일본어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학교는 전쟁 기간 동안 콜로라도주 볼더에서 운영되었다.1941년(쇼와 16년)에는 미국 국무부 극동과의 요청으로 잠시 근무하다 하버드 대학교로 복귀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1942년(쇼와 17년) 미국 육군 통신대의 요청을 받아 일본어 번역 및 암호 해독 전문가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을 맡았다. 또한, 그해 여름부터 버지니아주 알링턴 홀(당시 미국 육군 정보국의 비밀 암호 해독 센터)에서 극비리에 암호 해독 관련 교육을 진행했다.
1942년 9월 14일, 라이샤워는 "일본에 대한 정책에 관한 각서"를 작성하여 미국이 아시아에서 전후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24][25] 20세기 후반 일본 역사학자 후지타니 다카시는 이 각서가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순전히 도구적이고 조작적인 입장"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26] 후지타니는 라이샤워가 "이미 전쟁 초기에 라이샤워는 전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에 봉사할 '꼭두각시 정권'의 수장으로 일본 천황을 유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당시까지 일본계 미국인이 '순전히 부담'이었으며, 미국이 그들을 미군에 입대시켜 '자산'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군인들이 선전 목적으로, 즉 미국이 인종차별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 특히 '황색 및 갈색 인종'에게 보여주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27]
1943년(쇼와 18년)에는 미국 육군 소령으로 임관하여 워싱턴 D.C.에서 일본군의 암호 해독, 정보 분석, 심리전 등 대일 정보전에 직접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쇼와 20년) 11월, 중령으로 제대한 라이샤워는 미국 국무부 외교 자문위원회 극동 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천황제의 존속 문제 및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 수립 과정에 관여했다.
2. 3. 학자로서의 경력
1927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오벌린 대학교에 입학했고, "1860년 이전의 미일 관계"라는 논문을 남겼다. 1931년 오벌린 칼리지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1] 라이샤워는 훗날 자신의 삶의 목표가 미국인들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리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2]오벌린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1933년에는 하버드-옌칭 연구소 소장이자 당시 몇 안 되는 일본학 연구자였던 세르게이 엘리세예프의 지도를 받아 프랑스, 일본, 중화민국에서 연수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배웠다. 같은 해 파리의 국립 동양어 학교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를 공부했다. 유럽 유학 중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여행했으며, 독일에서는 룀 사건 현장에 있기도 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방문 경험은 훗날 그가 일본과 유럽 역사의 유사성 및 일본 근대화에서 봉건 시대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35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옌칭연구소 연구원 시절이던 1938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맥 매큔과 함께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들었다. 1939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세르게이 엘리세예프였다.[3] 박사 학위 논문은 당나라 시대 중국을 여행한 일본 승려 엔닌의 여행기(입당구법순례행기)에 대한 연구 및 번역인 "''닛토 구호 준레이 교키'': 엔닌의 당나라 여행 일기, 838-847"이었다.[4] 이 연구는 당시 대학원생에게 요구되던 높은 수준의 한학적 소양을 보여준다.[3][5]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사로 시작하여 40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군 정보장교 및 국무부 특별 보좌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6년 하버드로 돌아와 극동학회 부회장 및 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9월에는 인문 과학 고문단의 일원으로 연합국 점령하의 일본을 다시 방문하여 더글러스 맥아더와 회담했다.[46]
1950년대 초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동료 학자들이 어려움을 겪었으나, 라이샤워는 상대적으로 이념적 편향성이 적고 국무성에서의 활동이 일본과 한국 정책에 국한되었던 덕분에 화를 면했다. 그는 존 킹 페어뱅크와 함께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학부 개론 과정, 일명 "쌀 논(Rice Paddies)" 강좌를 개발했으며, 이는 널리 영향을 미친 교과서 《동아시아: 위대한 전통》(1958년)과 《동아시아: 현대의 변혁》(1965년)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여러 판으로 출간된 《일본: 한 국가의 이야기》(Japan: The Story of a Nation영어) 등 학계와 대중을 위한 저술 활동도 활발히 했다.
195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 언어학과 학과장도 역임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이 있다. 1981년 4월 22일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강의에서 "제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동아시아 연구에 관심을 가진 대학원생은 두 명밖에 없었습니다. 저와 형이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45] 그의 고별 강연은 높은 명성을 보여주듯 많은 학생과 관계자, 심지어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팀까지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2. 4. 주일 미국 대사 (1961-1966)
1960년 안보 투쟁 직후 미일 관계가 악화되었던 상황에서, 당시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장이었던 라이샤워는 일본을 방문하여 여러 일본인 친구 및 지인들과 만나 시위에 대한 일본의 시각을 들었다.[8]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1960년 10월호에 "손상된 대화(Broken Dialogue)"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시위가 공산주의 음모였다는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주장을 반박하며, 시위가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실제 불만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 지도자들이 일본 여론 지도자들과 소통하여 그들의 우려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지적하고, 이 "깨진 대화"를 복원하기 위해 숙련된 외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8]
이 논문은 새로 출범한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체스터 볼스 국무 차관 보좌관 제임스 C. 톰슨 주니어의 주목을 받았고, 라이샤워가 주일 특명 전권 대사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국무부 관리들은 대사가 주재국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을 경계하여 그의 임명을 반대했으나[9], 케네디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케네디는 라이샤워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구사하며 현지 사정에 밝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1961년 3월 19일 그를 주일 미국 특명 전권 대사로 임명했다.[49] 이는 일본과의 특별한 연고가 없는 직업 외교관이 주로 임명되던 전례를 깬 파격적인 인사였으며[9], 일본어를 아는 최초의 주일 미국 대사였다. 라이샤워와 그의 일본인 아내는 일본 사회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대사로서 라이샤워는 "평등한 파트너십(Equal Partnership)"을 기치로 내걸고 악화된 미일 관계 회복에 주력했다.[10] 그는 1961년 여름 워싱턴 D.C.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 간의 정상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하여 성사시켰으며, 이 회담은 미일 동맹이 상호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1] 라이샤워는 케네디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추진했으나, 케네디의 암살로 무산되고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대신 방일했다.[12] 그는 또한 "라이샤워 공세(''Raishawā rosen'')"[13]라 불릴 정도로 일본 전국 각지를 아내와 함께 순회하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직접 만나 대화했다. 그는 쇼와 천황 등 황족, 이케다 하야토나 사토 에이사쿠 같은 현직 총리, 요시다 시게루나 기시 노부스케 등 전직 총리뿐만 아니라, 사회당 등 야당 정치인, 재계 인사, 이케다 다이사쿠와 같은 종교 지도자, 노동조합 관계자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주일본 미국군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으며, 오키나와의 류큐 열도 고등 변무관 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에버럴 해리먼, 리처드 닉슨, 로버트 F. 케네디 등 일본을 방문한 미국 주요 인사들과 일본 정재계 인사들을 연결해주며 양국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린든 B. 존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이 심화되자, 일본 내 반미 감정이 고조되면서 라이샤워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64년 3월 24일, 라이샤워는 주일본 미국 대사관 로비에서 정신 질환 병력이 있는 19세 청년 시오타니 노리카즈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15][50][51] 시오타니는 메니에르병을 앓고 있었으며, 미국의 점령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알려졌다. 라이샤워는 도라노몬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수혈을 받으면서 "이것으로 제 몸 안에 일본인의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라고 발언하여 일본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52] 그러나 이 수혈 과정에서 C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이는 이후 그의 건강 악화와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16][17] 라이샤워는 3개월간의 입원과 하와이에서의 추가 검진 후 복귀했으며, 사건 직후 사임을 고려했으나 일본 국민에게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하여 유임을 결정했다.

이 피습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 국민에게 사과했고, 사건 다음 날 하야카와 타카시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55]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매혈의 위험성이 부각되면서 일본 정부는 수혈용 혈액 공급을 일본 적십자사가 전담하고 헌혈을 통해 조달하도록 각의 결정을 내렸다.[53] 후생성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입원 정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듬해 정신 위생법(당시 명칭) 개정으로 이어졌다.[54] 외국 요인 경호 강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경시청에 경호과(훗날 시큐리티 폴리스)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55]
1965년 이후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 내 반미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라이샤워는 미국의 전쟁 정책을 옹호하는 데 점점 더 큰 회의를 느꼈다.[14] 결국 1966년 7월, 워싱턴 D.C. 방문 중 존슨 대통령에게 사임 의사를 전달했다. 존슨 대통령은 그에게 극동 문제 담당 국무 차관직을 제안했지만 라이샤워는 이를 거절했다. 같은 해 7월 25일 사임 발표 후, 많은 일본인들의 아쉬움 속에 8월 19일 도쿄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2. 5. 대사 퇴임 이후
1966년 주일 대사직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라이샤워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복귀하여 연구와 강연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교수로서 남베트남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문제, 오키나와 반환, 그리고 한국 정책 재검토 등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45]라이샤워는 일본을 포함한 극동 지역 전문가로서 역대 미국 행정부와 헨리 키신저, 그리고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와 같은 외교 정책 관련 인사들에게 중요한 조언을 제공했다. 또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일본 총리나 한국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였던 김대중(훗날 대통령)과 같은 아시아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과도 교류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74년에는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지지하는 추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일본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외에도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 연구 평의회 이사,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이사, 아시아 재단 이사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미국과 아시아, 특히 일본 간의 학술 및 문화 교류 증진에 기여했다.
건강상의 어려움도 겪었다. 1964년 대사 재임 중 당한 피습 사건의 후유증으로 얻은 간염이 퇴임 후에도 재발하여 그를 괴롭혔다. 1975년에는 뇌졸중을 겪었고, 1983년에는 뇌내출혈을 겪으며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러한 질병의 후유증으로 인해 언어 능력, 특히 어린 시절부터 유창하게 구사했던 일본어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 이로 인해 일부 명예직에서는 물러나야 했지만, 1980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하버드 대학교 일본연구소 등에서 연구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며 다수의 저서를 출판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과 기여를 기리기 위해 1985년 하버드 대학교의 일본연구소는 에드윈 O. 라이샤워 일본학 연구소로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22] 같은 해,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부속 기관인 폴 H. 니체 고등국제학 연구소(SAIS)에도 에드윈 O. 라이샤워 동아시아 연구 센터가 설립되었다. 센터 헌정식에서 라이샤워의 제자였던 제이 록펠러 상원의원은 그를 "제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스승"으로 칭송했으며, 마쓰나가 나오부오 당시 주미 일본 대사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메시지를 대독하며 "일본을 그처럼 철저히 이해한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그의 깊은 이해를 높이 평가했다.[2]
1987년 겨울에는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 중이던 당시 일본의 황태자였던 아키히토 친왕과 미치코 비 부부가 라이샤워의 자택을 방문하여 머물기도 했다.
2. 6. 사망
주일 일본 대사로 재직 중이던 1964년에 괴한에게 칼에 찔리는 사고를 당했다. 이때 치료 과정에서 수혈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이 수혈로 인해 간염에 감염되었다. 라이샤워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이 간염(B형 간염[23])과 관련된 여러 질병 및 합병증으로 고통받았으며, 이로 인해 활발한 강의나 강연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1990년 여름, 간염 증상이 악화되자 연명 치료를 거부하였고, 같은 해 9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호이아에서 C형 간염 합병증[23]으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일본과 미국의 가교가 되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태평양에 뿌려졌다.3. 주요 업적
에드윈 라이샤워는 조지 M. 매큔과 함께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중 하나인 매큔-라이샤워식 표기법을 고안했으며, 일본학 연구에 기여하며 "근대화"론을 통해 근대 일본을 재평가하기도 했다.
3. 1.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개발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1938년, 라이샤워는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에 3개월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조지 M. 매큔(George M. McCune)과 함께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고안했다. 이 표기법은 1939년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며[33], 이후 오랫동안 한국어의 주요 로마자 표기법 중 하나로 널리 사용되었다.라이샤워는 한국의 문자 체계인 한글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아마도 모든 언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 체계일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34]
3. 2. 일본학 연구
라이샤워는 1939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 교수는 도쿄 대학교 최초의 서양인 졸업생이었던 러시아-프랑스계 일본학자 세르게이 엘리세예프였다.[3]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9세기 당나라를 여행한 일본 승려 엔닌의 여행기를 연구하고 번역한 "''닛토 구호 준레이 교키'': 엔닌의 당나라 여행 일기, 838-847"이었다.[4] 엔닌의 저서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記일본어; 중고 중국어: ''Nyip-Dang gjuw-pjop zwin-léi hæng-kì'')는 고전 중국어로 쓰였는데, 라이샤워의 연구는 당시 대학원생에게 요구되던 높은 수준의 한학 지식을 보여주었다.[3][5]1973년, 라이샤워는 하버드 대학교 일본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이 연구소는 1985년 그의 75세 생일을 맞아 그의 공로를 기려 에드윈 O. 라이샤워 일본학 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22]
또한 1985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 산하 폴 H. 니체 고등국제학 연구소(SAIS)에 에드윈 O. 라이샤워 동아시아 연구 센터가 개설되어 그를 기렸다. 볼티모어에서 열린 헌정식에서 그의 제자였던 제이 록펠러 상원 의원은 라이샤워를 "교사가 되어야 할 모습, 즉 제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행사에서 당시 일본 대사였던 마쓰나가 나오부오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나는 일본을 그처럼 철저히 이해한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는 내용의 친필 메시지를 전달했다.[2]
라이샤워는 "근대화"론을 통해 근대 일본을 재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시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1942년 9월 14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3년 전, 당시 하버드 대학교 극동 언어 강사였던 라이샤워는 "일본에 대한 정책에 관한 각서"를 작성했다. 이 각서에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평화를 얻는" 전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이 담겨 있었다.[24][25]
20세기 후반 일본 역사학자 후지타니 다카시는 이 각서가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순전히 도구적이고 조작적인 입장"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26] 후지타니는 자신의 논문 "라이샤워 각서: 모토 씨, 히로히토,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군인"의 초록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이미 전쟁 초기에 라이샤워는 전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에 봉사할 "꼭두각시 정권"의 수장으로 일본 천황을 유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당시까지 일본계 미국인이 "순전히 부담"이었으며, 미국이 그들을 미군에 입대시켜 "자산"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군인들이 선전 목적으로, 즉 미국이 인종차별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 특히 "황색 및 갈색 인종"에게 보여주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7]
3. 3. 한미일 관계 증진
1973년, 라이샤워는 하버드 대학교의 일본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었다. 그의 공로를 기려 1985년, 그가 75세가 되었을 때 연구소는 에드윈 O. 라이샤워 일본학 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2] 라이샤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일본 및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 대중과 정부에 적극적으로 알렸다.또한 1985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 산하 폴 H. 니체 고등국제학 연구소(SAIS)에 에드윈 O. 라이샤워 동아시아 연구 센터가 개설되어 그의 업적을 기렸다. 볼티모어에서 열린 헌정식에서 그의 제자였던 제이 록펠러 상원의원은 라이샤워를 "교사가 되어야 할 모습, 즉 제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같은 행사에서 일본 대사 마쓰나가 나오부오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총리의 친필 메시지를 대독하며 "나는 일본을 그처럼 철저히 이해한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전했다.[2]
4. 비판과 논란
에드윈 라이샤워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 외교 활동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주요 논란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교토 폭격 방지에 기여했다는 주장의 진위 여부, 주일본 미국 대사 재임 시절 오키나와 반환 이후에도 미군 기지와 핵무기 배치를 유지하려 했던 계획, 그리고 미국 해군 함선의 핵무기 탑재 일본 기항을 용인하는 듯한 발언으로 일본의 비핵 3원칙과 관련된 논란을 일으킨 점 등이 있다. 이러한 사안들은 그의 활동이 미국의 국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주재국의 주권이나 정책과 긴장을 유발했음을 보여준다.
4. 1. 교토 폭격 회피 주장에 대한 반박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육군 정보부에서 일본 전문가로 활동했던 라이샤워가 교토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를 막았다는 주장이 전쟁 후 널리 퍼졌다.[28] 작가 로버트 융크는 그의 저서에서 라이샤워가 상사를 통해 전쟁 장관 헨리 L. 스팀슨을 설득하여 교토를 폭격 목표 목록에서 제외시켰다고 기술했다.[29] 또한, 전후 서독에서 출간된 『천 개의 태양보다 밝게』라는 책에는 라이샤워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 목록에 교토가 포함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상사에게 눈물로 호소했고, 이에 감명받은 상사가 스팀슨 장관에게 보고했으며, 과거 신혼여행으로 교토를 방문했던 스팀슨 장관의 도움으로 교토가 폭격 목록에서 제외되었다는 일화가 소개되었다.그러나 라이샤워는 이러한 주장을 명확히 부인했다. 그는 자서전 『라이샤워 자서전』에서 해당 일화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으며[56], "만약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의 친구인 교토 도시샤의 오티스 캐리가 충분히 증명했듯이, 교토를 파괴로부터 구한 유일한 사람은 수십 년 전 신혼여행 이후 교토를 알고 존경해 왔던 당시 전쟁 장관 헨리 L. 스팀슨이다."[30]라고 말했다.
요시다 모리오에 따르면, 교토가 공습을 피한 실제 이유는 라이샤워의 역할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교토는 전쟁 말기까지 대규모 전략 폭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원자 폭탄의 파괴 효과를 측정하기 용이하다"는 판단 아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이어 세 번째 원자 폭탄 투하 예정지로 고려되었다.[57] 당시 교토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
- 일본 육군 제16사단의 위수지였다.
- 도쿄 방면에서 오사카나 고베 등 주요 도시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연료, 석탄, 철광석, 석회석 등 중요 물자 수송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 미쓰비시나 시마즈 제작소와 같은 군수 공장이 다수 위치한 "군사 도시"였다.
- 교토부 내에는 일본 내 희소 광물인 니켈 광산(오에산)과 다수의 텅스텐 광산이 존재했다.
이러한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교토는 당연히 미국의 전략 목표였으며, 폭격을 피한 것은 라이샤워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전략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57]
4. 2. 오키나와 미군 기지 관련 발언
1996년에 기밀 해제된 비밀 각서에 따르면, 주일본 미국 대사로 재직 중이던 1965년 7월 16일, 라이샤워는 도쿄에서 열린 미국 고위 군 및 민간 관리 회의에서 오키나와현 반환 이후에도 미국이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핵무기를 배치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을 제안했다.[31]라이샤워는 일본의 보수 여당에게 반환이 갖는 상징적인 정치적 중요성을 이용하는 전략을 세우면서도, 미국이 "일본에게 우리 기지 사용에 대해 실제 발언권을 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31] 그는 일본이 오키나와현을 포함한 자국 영토 내 핵무기 배치를 받아들이고,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미군 지휘관들에게 섬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보장한다면, '완전한 주권'이 일본으로 반환되더라도 미국이 섬에 기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31]
이러한 라이샤워의 제안들은 "1969년의 미·일 오키나와 반환 협정의 핵심 요소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군사 주둔을 거의 영구적으로 만들고 핵무기 도입 옵션을 유지"하는 결과를 낳았다.[26] 1981년, 라이샤워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핵무기를 탑재한 미국 해군 선박이 도쿄의 묵시적인 승인 하에 일본 항구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왔다는 사실을 직접 밝히기도 했다.[32]
또한 비밀 각서는 오키나와에서 미국의 군사 주둔이 지속되는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라이샤워의 제안도 담고 있었다. 오키나와 문학,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저술가이자 강사인 스티브 랩슨은 2010년 기사 "'비밀' 1965년 메모, 오키나와 반환 후 미군 기지 및 핵무기 옵션 유지 계획 공개"에서 라이샤워가 오키나와에서의 "소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미국의 원조 증액, 기지 건설을 위해 미국이 몰수한 토지 소유주에 대한 보상을 늘리기 위한 프라이스 법 개정, 그리고 일본 국기 게양 금지 완화를 제안했다고 썼다. 랩슨은 "당시 그의 영향력을 정확하게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세 가지 권고 사항이 모두 미국의 정책이 되었다"고 지적했다.[26]
4. 3. "라이샤워 발언"과 비핵 3원칙 논란
1981년 5월 18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고모리 요시히사 기자의 취재에 응한 라이샤워의 발언이 실렸다. 그는 "비핵 3원칙이 규정하는 반입은 육상 배치를 의미하며, 핵무기를 탑재한 함선의 기항은 포함되지 않는다", "미일 간의 양해 하에 미국 해군의 함선이 핵무기를 실은 채 일본 기지에 기항했다", "이에 대해 미일 안보 조약이 규정하는 '사전 협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 측도 이해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핵무기 탑재 함선이 일본 기항 시 무기를 내리지 않는다는 '라록 증언'과 함께 '라이샤워 발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59]이 발언으로 인해 전직 미국 대사가 일본의 비핵 3원칙 위반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어, 일본 정부는 야당 등으로부터 거센 추궁을 받았다. 이에 당시 소노다 나오 외무대신은 마이클 맨스필드 주일 미국 대사로부터 "일본 정부의 핵 정책에 위배되지 않는다(따라서 핵 반입은 없다)"는 미국 정부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받았으며, 이를 근거로 추가적인 대미 협상은 하지 않겠다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59]
그러나 1999년에는 일본의 한 대학교수가 미국의 외교 문서를 통해, 1963년 라이샤워가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과의 사이에서 일본 내 기지에 핵무기 반입을 승낙했다는 내용의 미국 국무부와 대사관 간 통신 기록을 발견했다. 이는 라이샤워의 1981년 발언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졌다.
이처럼 당시 미국 대사가 직접 핵 반입 사실을 인정하고, 이후 외교 문서를 통해 과거 외무대신과의 합의 사실까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자유민주당 정권은 핵 반입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009년 8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민주당의 하토야마 정권은 이 문제를 '미일 핵 반입 문제'로 규정하고 진상 규명에 나섰다. 오카다 가쓰야 외무대신은 외무성에 관련 조사를 지시하고 그 결과를 같은 해 11월 말까지 공개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라이샤워는 오키나와 반환 논의가 진행 중이던 1967년, "오키나와의 부대를 통째로 괌으로 이전하는 것이 가능하며, 비용은 총액 30억달러에서 40억달러 정도"라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발언 직후, 미국은 오키나와 기지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굳혔다는 사실이 2011년 2월에 공개된 일본 측 외교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60]
5. 저서
라이샤워의 저작은 OCLC/WorldCat에 따르면 18개 언어로 1,000편 이상 출판되었고, 23,000개 이상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40]
-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음성 구조에 기반하여'' (1939) G. M. 매쿤 공저[41][42]
- ''대학생을 위한 기초 일본어'' (1942) S. 엘리세예프 공저
- ''일본: 과거와 현재'' (Japan: Past and Presenteng; 1946; 개정판 1952, 1964)
- ''미국과 일본'' (The United States and Japaneng; 1950; 개정판 1957, 1965)
- ''초기 일본 문학 번역'' (Translations from Early Japanese Literatureeng; 1951) 조셉 야마기와 공저
- ''엔닌의 당나라 여행기'' (Ennin's Travels in T'ang Chinaeng; 1955; 재판 2020)
- ''엔닌의 일기: 법을 찾기 위한 중국 순례의 기록'' (Ennin's Diary: The Record of a Pilgrimage to China in Search of the Laweng; 1955; 재판 2020)
- ''원함: 아시아 정책'' (Wanted: An Asian Policyeng; 1955)
- ''우리의 아시아 지식의 최전선'' (Our Asian Frontiers of Knowledgeeng; 1958)
- ''동아시아: 위대한 전통'' (East Asia: The Great Traditioneng; 1960) J. K. 페어뱅크 공저
- ''동아시아, 현대적 변혁'' (East Asia, The Modern Transformationeng; 1965) J. K. 페어뱅크 및 A. M. 크레이그 공저
- ''동아시아 문명사'' (A History of East Asian Civilizationeng; 1965)
- ''베트남을 넘어: 미국과 아시아'' (Beyond Vietnam: the United States and Asiaeng; 1968)
- ''일본: 국가의 이야기'' (Japan: The Story of a Nationeng; 1970; 개정판 1974, 1981, 1990)
-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A New Look at Modern Historyeng; 1972)
- ''초기 일본 문학 번역'' (Translations from Early Japanese Literatureeng; 1972) 조셉 K. 야마기와 공저
- ''21세기를 향하여: 변화하는 세계를 위한 교육'' (Toward the 21st Century: Education for a Changing Worldeng; 1973)
- ''동아시아, 전통과 변혁'' (East Asia, Tradition and Transformationeng; 1973; 개정판 1989) J. K. 페어뱅크 및 A. M. 크레이그 공저
- ''일본인'' (The Japaneseeng; 1977)
- ''일본과 미국 사이의 나의 삶'' (My Life Between Japan and Americaeng; 1986, 자서전)
- ''1986년의 미국과 일본: 파트너십이 작동할 수 있을까?'' (The United States and Japan in 1986: Can the Partnership Work?eng; 1986)
- ''오늘날의 일본인: 변화와 연속성'' (The Japanese Today: Change and Continuityeng; 1988; 마리우스 B. 얀센과 개정판 1995)
- ''일본, 전통과 변혁'' (Japan, Tradition & Transformationeng; 1989)
6. 수상 및 영예
- 1957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됨.[35]
- 1957년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스타니슬라스 쥘리앙상을 수상함.
- 1968년 욱일대수장을 받음.
- 1973년 미국 철학 학회 회원으로 선출됨.[36]
- 1975년 일본 국제교류기금상을 수상함.[37]
- 1984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에드윈 O. 라이샤워 동아시아 연구 센터가 설립됨.[38]
- 1985년 하버드 대학교에 에드윈 O. 라이샤워 일본학 연구소 (RIJS)가 설립됨.[39]
- 1986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에드윈 O. 라이샤워 강연 시리즈가 시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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